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로코 위기 (문단 편집) == 제1차 모로코 위기 == 사건이 발발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탕헤르 위기(Tangie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지브롤터 해협|이어주는 곳]]에 자리잡은 특성상 많은 [[유럽]] 국가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1880년에 체결한 [[마드리드 조약]]에 의거하여 모로코의 독립은 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았으나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그런거 없다|그런 건 없었고]] 프랑스가 내정개혁을 빌미로 적극적으로 [[스페인]]과 함께 모로코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세력 확장이 심히 못마땅했던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1905년]] 3월 31일 전격적으로 모로코를 방문하여 [[술탄]]과 회담을 갖고 ''''모로코의 자주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빌헬름 2세의 지원에 고무된 모로코의 술탄은 프랑스가 요구한 내정 개혁을 거부해버리는 패기(!)를 발휘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빌헬름 2세와 제국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베를린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들 사이의 회담을 조성하여 최대한 독일의 이권을 챙겨보려는 심산이었지만 프랑스는 완강히 거부했고 독일도 물러서지 않음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가능성까지 감지되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아예 군대를 [[알자스-로렌|엘자스-로트링겐]] 국경 근처까지 전진시켜 놓았고 독일도 [[예비군]]을 소집시켜 놓았다.] 하지만 [[보불전쟁]]의 참패가 기억에 생생했던 프랑스 정부는 이미 세기초에 유럽 열강 중에 최고의 생산력에 도달한 독일과 혼자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위험이 너무나 크다고 판단했고 결국 프랑스가 한 발 물러서면서 이듬해 1월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유럽 열강들 사이에 회담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알헤시라스 회담에서 '''독일은 예전과는 달리 왕따가 된 건 자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는 비스마르크의 신들린 외교 능력으로 프랑스를 고립시켰고 그 덕택에 보불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제외한 그 어떤 국가도 독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 특히나 [[건함 경쟁]] 등으로 독일과 대치 관계였던 영국이 시종일관 단호하게 프랑스의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 결정타[* 이미 [[영불협상]]에서 양국은 서로 협조하기로 결의했다.]였고 결국 독일은 모로코 내 프랑스의 지배권을 수용해야만 했다.[* 굳이 얻은 게 있다면 프랑스로 하여금 모로코 내 [[경찰]]에 대한 지배권은 토해내게 했던 것인데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이미 프랑스가 모로코를 거의 다 잠식한 상황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 ~~그냥 체면내는 용~~] 1차 모로코 위기를 통하여 독일 전역은 자국이 국제 왕따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제대로 망신을 당한 빌헬름 2세는 분노하여 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다만 이 시기에는 [[러불동맹]]과 [[영불협상]]만 체결됐을 뿐 아직 러시아와 영국을 잇는 [[영러협상]]은 체결되지 않았다.] 사이의 긴장감은 점점 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